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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씨이야기

마른땅
2019.03.24 20:09 3,942 0

본문

1. 나무타기를 좋아하는 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 소설은 화자인 '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가 겨우 1미터를 빠듯 넘겼던 시절 나는 나무타기를 좋아했다. 그 시절 마을에 좀머 씨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년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다녔다. 하지만 정작 왜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고,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2. 좀머 아저씨에게 들은 한 문장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는 좀머 아저씨가 분명하고 확실한 문장을 말하는 소리를 딱 한번 들었다. 7월 말 지독히 날씨가 나빴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자동차를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빗줄기가 내리더니 이내 우박으로 변했다. 우박은 처음에는 바늘귀만하다가 돌멩이만큼 커졌다. 얼마 후 우박도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그때 지나가다 한 사람을 발견했다. 좀머 씨였다. 아버지가 태어준다고 불렀다. 그는 불러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러다가 죽겠어요!"
아버지가 틀에 박힌 빈말이라고 하던 그 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그 말을 처음으로 썼다. 좀머 씨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3. 좀머 아저씨 이야기 - 아저씨는 그냥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머니는 좀머 씨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밀폐 공포증이 심하다고 했다. 밀폐 공포증이란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누나는 좀머 씨는 항상 경련이 일어나서 온몸이 떨린다고 했다. 밖을 돌아다닐 때만 경련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난 좀머 씨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이렇게 하라고 강요 받지도 않고 있으며, 단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았다.


4. 내 짝사랑, 카롤리나 퀵켈만


우리 반에 카롤리나 퀵켈만이라는 여자 아이가 있다. 나는 카롤리나를 내 곁에 앉혀 놓고 목덜미나 다른 어느 곳에 입을 대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실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카롤리나가 내게 와서 말했다.
"너 아랫마을에 만날 혼자 가지?"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그 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애를 맞을 준비를 했다. 적당한 산책로를 알아 두려고 종일 숲속을 해맸다.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했다.
월요일이 되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여학생들만 수업을 한 시간 더 받았다. 돌발 사태였지만 별로 언짢지 않았다. 반드시 극복해 낼 수 있는 보충 시험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카롤리나가 나왔다.
"얘! 너 나 기다렸니?"
"얘! 나 오늘 너랑 같이 안 가. 엄마 친구가 아프대. 그래서 엄마가 거기 안 간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
그 뒤로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5. 피아노 선생님의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 나,


좀머 아저씨를 만나 자살을 포기하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키가 벌써 1미터 35였고 몸무게는 32킬로그램이었다. 난 미스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배웠다. 선생님은 꼬부랑 늙은이에 백발이었고, 허리는 굽었고, 피부는 쭈글쭈글했다. 내게는 너무 큰 어머니 자전거를 타고 선 자세로 페달을 굴려가며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생님 댁까지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었다.

문제는 오소리개가 나를 울타리에 붙잡아두고 자동차 두대와 행인 네 명을 만났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정확히 10분 늦었다. 선생님은 다짜고짜 화를 냈고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다. "개 때문에."하고 이야기하자 내 말을 끊고 개랑 놀고 얼음 과자를 사먹었다고 단정지었다.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고 눈물만 흘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중요한 일로 연습을 제대로 못했다. 선생님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내게 퍼부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난 누나가 아무리 피아노를 못 치는 사람이라도 칠 수 있다던 디아벨리곡을 칠 때도 똑같은 실수를 두번이나 저질렀다. 선생님은 화를 내며 재채기를 했고 둘째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치고는 내가 실수한 건반을 눌렀다. 이때 콧털에 붙었다가 둘째손가락으로 옮겨 붙었던 크기가 손톱만 하고 굵기는 연필만한 녹황색 영롱한 꼬딱지가 건반에 붙었다. 다시 같은 연주를 시작했고 난 꼬딱지가 붙은 그 검은 건반을 눌러야만 했다. 검은 건반을 칠 순간이 도래했고 난 무슨 일이 있을 줄 뻔히 알면서 죽는 것도 무섭지 않다는 듯 옆 건반을 쳤다. 선생님은 악마처럼 펄펄 날뛰었다. 사과를 집어 던졌고 사과는 벽에 흠집을 내며 터져 버렸다. 선생님은 소리쳤다.

"네 물건 싸 가지고 꺼져 버려."

난 세상을 원망했다. 나를 늦게 만든 개도 행인도, 힘든 곡을 써서 날 모욕스럽게 만든 작곡가도, 구역질 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풍겔 선생님도, 딱 한번 도와줄 것을 간청했찌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느님도 원망했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잘 먹고 잘 해 보라지!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난 죽기로 결심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제일 큰 나무를 찾아갔다. 그 나무 위로 올라갔다. 너무 쉬운 일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모두들 가슴을 치며 울겠지. 장례식 중 가장 멋진 장례식이 될 거고 사람들은 슬픈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내가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난 세상에 대한 복수와 세상 안에서의 영생, 복수를 택하기로 했다. 셋하면 뛰어내리기로 했다.

"하나! 둘!"
하는 순간 길에서
"탁! 탁! 탁!"
하는 소리가 났다. 나무 밑에 좀머 아저씨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서서 숨을 헐떡이며 사방을 살폈다. 아저씨는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미처 숨쉬기도 전에 바로 일어서더니 한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소리는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신음소리는 아저씨에게 안식을 준다든가 단 일초라도 아저씨를 쉬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저씨는 금방 몸을 추스리며 일어났다. 다시 사방을 살피며 빵을 먹고는 떠났다.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싹가셨다. 웃기는 짓거리 같았다.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6. 좀머 아저씨의 죽음


그 뒤로 5, 6년쯤이 지난 뒤였다. 그날 나는 아저씨를 다음 번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세월이 지난 만큼 난 키가 1미터 70에 육박했다. 그 무렵 고등학교 5학년에 올라갈 차례였던 내 생활은 갈등의 점철이었다. 언제나 어떤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도리상 해야 되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거나,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요를 받았고, 지시를 받았고,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미켈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 다음 집으로 향하던 가을 날의 일이었다. 호수 가장자리에 좀머 아저씨가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물이 아저씨의 장화 위까지 차있었다. 박아 놓은 말뚝 같이 서있던 아저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깊이가 더해가더니 물이 엉덩이 위, 가슴까지 차올랐다. 나는 놀랐기보다는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당혹스러웠으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물이 아저씨의 목구멍까지 찾고 이어서 턱위까지.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았지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지르지도 못했다. 아저씨를 구하기 위해서 뗏목이나 공기매트를 찾으려고 해 보지도 않은 채 멀리에서 가라앉고 있는 작은 점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7. 아저씨의 죽음 뒤 사람들의 반응


좀머 아저씨가 없어졌다는 것이 알려지기까지는 2주일이 걸렸다.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은 좀머 아저씨의 다락방의 월세를 받으려던 리들 아저씨의 부인이었다. 아저씨는 2주일이 더 지난 뒤에야 실종 신고를 했고,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광고가 났다. 그때서야 아저씨의 온전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

"완전히 돌아 버렸을 거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했다. 나는 아저씨의 행방을 알았지만 침묵을 지켰다. 내가 왜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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